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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깨달음은 체험(體驗)이다.
작성자 초의차 (ip:59.5.7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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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23-07-05 11: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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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26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30.

 

깨달음은 체험(體驗)이다.

 

어찌,

깨달음을 체험해 보지도 않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을가,

 

깨달음은,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체험이 아니면,

깨달음은 알 수가 없다.

 

경전을 보거나,

남에게 들어서 안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는 것 뿐이다.

 

이해하는 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해하는 사람은,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깨달음은,

만물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체험하는 깨달음이다.

 

두번째 깨달음은,

만물의 작용을 깨닫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과 견성을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견성을 했다면,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견성은,

깨달음이 아니다.

 

견성은,

마음의 본성을 본 것이고,

 

깨달음은,

만물의 본성을 보고,

 

만물의 본성이 텅비어 있는 것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만물의 본성을

법성(法性)이라고 한다.

 

이 법성이 텅비어 있기에,

이를 법공(法空)이라고 한다.

 

법공을 깨달은 것이

첫번째 체험하는 깨달음이다.

 

첫번째 깨달음을 얻고 나면,

법안(法眼)이 열린다.

 

법안이 열리면,

만물의 작용을 볼 수가 있다.

 

법안은,

만물의 작용을 보는 눈이다.

 

만물의 작용을 보면,

모두 텅비어 있다,

 

만물의 본성이나,

만물의 작용이,

 

모두 텅비어 있는,것이다.

 

만물의 공성(空性)을 보고,

깨닫는 것이 두번째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두차레에 걸쳐 크게 일어난다.

 

깨달음은,

만물의 본성과,

작용에서 일어난다.

 

두번째 깨달음을 얻고나면,

천안(天眼)이 열린다.

 

천안이 열리면,

온 세상을 다 볼 수가 있다.

 

천안은,

현상계를 직관으로 보는 눈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체험이다.

 

체험을 해야만,

혜안도 열리고,

법안도 열리고,

천안도 열린다.

 

체험을 하지 못하면,

혜안도,

법안도,

천안도 열리지 않는다.

 

이것이,

체험이 진실인 이유이다.

 

천안이 열리면,

만물의 무상함을 깨달을 수가 있다.

 

만물의 무상함을,

깨닫게 되면

공각(空覺)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본질이다.

 

어찌,

체험을 하지 않고,

깨달음을 안다고 하겠는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도,

체험한 것을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체험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은,

설명을 할 수가 있지만,

 

체험은,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오직체험을 통해서,

알고 느끼는 것 뿐이다.

 

체험하는 과정은

설명을 해 줄수 있지만,

 

체험한 경지를

설명해 줄 수는 없다.

 

깨달음을 체험한

분들이,

온갖 방편을 쓰는 이유이다.

 

방편 뿐이다.

부질없는,


2023년 7월 4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29.

 

견성은 체험(體驗)이다.

 

이론(理論)이나

지식(知識)이 아니다.

 

그러므로,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오직 체험이다.

체험 뿐이다.

 

마음의 본성을

의식이 본 것이다,

 

의식이 본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본 것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물질이 아니기에,

설명할 수가 없다.

 

처음 맛본 차 맛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본 상태,

맛 본 상태,

그 느낌,

그 맛,

그 감촉을

어떻게 설명을 할 수 있을가.

 

설령,

설명을 해 준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알 수가 있을가,

 

맛을 직접 보거나,

견성을 체험해 보거나,

깨달음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체험을 해보지 않고,

들은 사람은 이해만 할 뿐이다.

 

견성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견성을 해보지 않으면,

마음의 본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부처님께서,

있다고 하니까,

있는 줄 안다.

 

자신이 직접 보고 알아서,

있는 줄 아는 것이 아니다.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내가 보지 못했는데,

 

보지 못한 사람은,

속아도 모른다.

 

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안 보고 어떻게 아는가,

남 말을 듣고 아는 것이

진실로 아는 것인가.

 

부처도 남이다.

 

남 말을 듣고 믿는다면,

그대는 속고 있는 것이다.

 

속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잘못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경전(經典)에 보면,

너무도 잘못된 곳이 많다.

 

조사(祖師)의 어록에도,

너무도 잘못이 많다.

 

그대는그것들을

그대로 믿고 있지 않은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세상을 속일 수밖에 없다.

 

지금,

그대는 세상을 속이고 있다.

 

속이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한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허황된 말로 세상을 속이고 있다.

 

본인이 잘못 알고,

있는 줄도 모른다.

 

잘 모르고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가.

 

모르기 때문에,

속고 속이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

진실인줄 알고 있다.

 

언제쯤,

눈을 뜨고

속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한 생은,‘

짧고 허망하다.

 

이 한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낼 것인가.


애석하다,

참으로 애석하다.


2023년 7월 2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28.

 

마음은 생명(生命)이 없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내 몸은 생명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고 죽지만,

 

마음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생사(生死)가 없다.

 

견성을 해서,

마음의 본성을 보면,

 

생사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음의 본성은,

물질(物質)이 아니다.

 

그래서,

생겨나거나 소멸되지도 않는다.

 

생멸(生滅)이 없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사(生死)가 없다.

마음의 본성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작용인,

의식도 생명이 없다.

 

그래서,

의식도 생사가 없다.

 

그러나

마음의 작용인,

의식은 물질이다.

 

물질이기 때문에

생겨났다가 소멸된다.

 

의식은,

생사는 없어도,

생멸은 있다.

 

의식은,

생겨났다가 소멸된다.

 

의식과 생명은,

내 몸에서 생사를 함께 한다.

 

의식과 생명은,

내 몸과 수명을 같이 한다.

 

생명이 죽으면,

내 몸은 죽는다.

 

의식이 사라지면,

내 몸은 따라서 죽는다.

 

의식과 생명,

둘 중에 하나만 사라져도,

결국에

내 몸은 따라서 죽는다.

 

의식의 작용인

생각도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각도 생사가 없다.

 

생각도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생각은,

물질(物質)이다.

 

그래서 생각은,

생겨났다가 소멸된다.

 

생각은,

생멸(生滅)이 있다.

 

생멸이 있는 생각은,

전기 에너지로 작동한다.

 

그래서,

생각은 광속(光速)으로 움직인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각의 속도는 광속이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생각은,

하루에 오만가지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오만가지 생각이,

모두 번뇌 망상이다.

 

마음이나,

의식이나,

생각이나,

 

모두 생명이 없다.

 

그래서,

생사(生死)가 없다.

 

마음은

태어 나거나 죽지 않는다.

 

오직

몸만 태어나고 죽는다.


2023년 6월 30일.


고월 용운합장.




견성(見性) - 마음을 보다 127.

 

수행(修行)은 체험이다.

 

수행을 하는 행위는

모두 체험이다.

 

수행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은

몸과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수행은,

생각으로 행동을 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수행은,

생각이 화두를 들거나,

몸이 삼매를 체험하는 것이다.

 

수행은,

눈으로 달을 보거나,

생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수행은,

생각이 그치는 것이나,

몸이 사라지는 것이다.

 

수행은,

모든 행위가 다 체험이다.

 

체험이 되어야만,

수행이 된다.

 

체험이 아니면,

수행이 되지 못한다.

 

체험이 아니면,

견성을 할 수도 없다.

 

체험이 아니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다.

 

체험이 아니면,

혜안(慧眼)이 열리지도 않는다.

 

체험이 아니면,

직관(直觀)이 작용하지도 않는다.

 

체험이 아니면,

지혜(智慧)가 생기지도 않는다.

 

체험이 아니면,

법안(法眼)이 열리지도 않는다.‘

 

체험이 아니면,

법성(法性)을 볼 수도 없다.

 

체험이 아니면,

법공(法空)을 볼 수도 없다.

 

체험이 아니면,

공각(空覺)을 이룰 수도 없다.

 

체험이 아니면,

천안(天眼)이 열리지도 않는다.

 

체험이 아니면,

무상(無常)을 깨달지도 못한다.

 

체험이 아니면,

물질화가 되지 못한다.

 

체험이 아니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체험이 아니면,

실상(實相)을 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다 체험이다.

 

오직 체험만이,

모든 것을 실존하게 한다.

 

체험은,

현재 이 순간이다.

 

체험은,

현재 이 순간만 존재한다.

 

체험은,

순간순간만 존재한다.

 

체험은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체험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

 

설명은,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설명을 해줘도 모른다.

 

이해만 할 뿐이다.

 

결국에는,

그가 체험을 해야만 알게 된다.

 

견성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알지 못하고,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

 

그는,

이해하고 알아차릴 뿐이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모른다.

 

오직,

이해하고 짐작할 뿐이다.


2023년 6월 28일.


고월 용운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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